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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오피니언] [전영기의 시시각각] 최장집의 ‘관제 민족주의’ 경고

작성자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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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민족주의적 열정은 정치적으로 관리될 필요가 있다. 민족 자체는 숭고하다. 거기에 주의라는 이념이 붙고 열정이라는 불이 더할 때 숭고함은 사라지고 국가는 위험해 질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베네수엘라다. 풍요로웠던 석유 경제가 붕괴하고 국민 평균 몸무게가 한 해에 11㎏ 줄었다. 인구의 10% 이상이 해외로 빠져나갔다. 급기야 한 나라에 두 대통령이 각축하는 지구 최악의 재난 국가로 떨어졌다. 베네수엘라의 참극은 1999년 우고 차베스의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에서 시작했다. 지난 20년을 돌이켜 보니 차베스와 그의 후계자 니콜라스 마두로의 민족주의는 종족주의일 뿐이다. 반미(反美)라는 정치적 목적에 복무하는 수단이었다. 그들의 사회주의는 싸구려 정치 상품이었다. 분배의 천국이라는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 국고 파탄을 미화(美化)하는 명분에 불과했다. 베네수웰라의 반미 종족주의는 국가의 파괴와 국민의 해체로 막을 내리고 있다.
한국은 좌파 민족주의 성향의 문재인 정권이 통치한다. 이 정권이 김대중 정부 때 청와대 정책기획위원장을 지낸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의 경고를 경청했으면 한다. 최 명예교수는 지난 15일 3·1운동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문재인 행정부가 추진하는 역사 청산 특히 친일 잔재 청산에 대해서는… 관제 민족주의(official nationalism)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보인다”고 비판했다. 발표문의 제목은 ‘한국 민족주의의 다성(多聲)적 성격에 관하여’다. 최장집은 “역사는 관제 교육이 아닌 학계와 시민사회의 자유 공간 안에서” 이뤄져야 하며 “(일제 청산) 관제 캠페인은 현 정부가 정당성의 근거를 남북한의 역사적 정통성과 결합시키려는 의도”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이 3·1절 기념사에서 언급한 친일 청산에 대해 최장집은 “그동안 진보를 빨갱이로 공격했던 보수를 향한 표현”으로 해석했다. 보수는 과거사를 망각하고 역사의식도 없이 독립운동을 폄훼하는 존재로 타락했다. 문 대통령의 청산 대상은 보수 자체이다. 관제 민족주의의 문제는 첫째, 역사 청산을 하면 할수록 분열과 갈등이 커진다는 점이다. 둘째, 일본을 나치와 비유하거나 악마화해 정치 공간이 닫히게 된다.

최장집은 한국의 대표적인 정치학자이자 진보 진영 사람으로 인식돼 왔다. 그런 만큼 그의 발표는 문재인 집권세력과 지지층에 충격을 줄 것이다. 발표문의 후반부엔 같은 민족이라고 해서 북한과 1민족 1국가 체제, 즉 민족통일국가를 반드시 추구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주장이 나온다.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가치와 시장경제적 자본주의의 실체를 민족주의적 정서보다 중시하는 태도다. 민족주의적 열정에 사로잡혀 이 정권이 범할지 모를 위험과 오류를 지적한 것이기도 하다.

필자는 오래전부터 탁월한 민주주의 국가인 자유 한국이 봉건의식에 찌든 전체주의적 1인 왕국 북한과 통일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하나의 민족인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두 나라로 공존하듯, 한국이 북한과 다른 나라로 서로 도발 없이 살면 좋다고 봤다. 이 땅의 수 십년 운동권 세력이 분단체제론 운운하며 북한과 마치 하나의 조국이 돼야 하는 것처럼 구는 모습이 못마땅할 때가 있었다. 민족주의적 열정이 무능하거나, 어리석거나 정치공학적인 권력과 결합하는 사태를 경계했다. 최장집의 글은 위선과 허위의식이 지배적인 현재 정치 풍토에서 모처럼 발견한 사이다 논문이다. 2010년 그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이상의 생각 거리를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전영기의 시시각각] 최장집의 ‘관제 민족주의’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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